상재상서(上宰相書)
1839년 정하상 바오로 성인께서 쓰신 호교론서(護敎論書)이자 간략한 교리서. 당시 천주교 박해의 주동자였던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보낸 서신으로, 헌종 5년 기해박해(1839)가 일어나자 성인께서는 체포를 직감하시고 미리 상재상서를 써 두었다가 체포 다음날인 6월 1일 종사관을 통해 우의정에게 보냈다고 한다.
별첨형식의 우사(又辭)까지 합쳐 모두 3,400여 자에 불과한 짤막한 글인데, 천주교 기본교리에 대한 설명, 호교론, 신교(信敎)의 자유를 호소한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즉, 첫째 부분은 보유론적(補儒論的)인 견지에서 천주의 존재를 논하고, 천주십계(天主十誡)를 들어 천주교의 실천윤리를 설명하였다.
둘째 부분에서는 호교론을 전개하여 천주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가 아님을 강조하면서, 말미에 「우사」라는 글을 첨가하여 조상제사와 신주를 모시는 일이 이치에 맞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셋째 부분에서는 천주교가 주자학적 전통에 어긋난 것이 아니며, 사회윤리를 올바르게 하는 미덕이 있음을 변증하여 신앙의 자유를 호소하였다.
이 글은 19세기 중반의 천주교 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과 교리에 대한 이해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는데, 1887년 홍콩에서 정하상의 약전을 첨가하여 출판되어 중국의 선교에 널리 이용되었다. 국내에서는 블랑(Blanc, M. J.G.)주교의 서명이 들어 있는 필사본과 한글역본 등도 전해진다.
원본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보관하고 있다.
伏以孟氏之廓闢, 楊墨者, 恐其肆害, 於儒門也. 韓愈之攻, 斥佛老者, 恐其惑亂於黔首也.
엎드려 아뢰옵건대 맹자(孟子)가 양자(楊子)와 묵자(墨子)를 사설(邪說)이라 하여 배척한 것은 그 사상이 유교 학계를 해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요, 한유(韓愈)가 석가(釋迦)와 노자(老子)를 쳐서 물리친 것은 그 사상이 일반을 미혹(迷惑)하여 혼란케 할까 해서였습니다.
古之君子立法,設禁必考, 基義理之如何. 爲害之如何. 然後當禁者禁之, 不當禁者不禁之. 若其果合於義理, 則雖蒭蕘之言, 聖人必取此, 不以人廢言之義也.
옛날의 군자가 법률을 제정하여 금지하는 조항을 둘 때에는 반드시 그 의리가 어떠한지 또 그 해로움이 어떠한지를 살폈습니다. 그렇게 한 뒤에라야 마땅히 금할 것은 금하였으며, 마땅히 금하지 말아야 할 것은 금하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 말이 과연 의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비록 나무꾼의 말이라도 성인은 반드시 취하였으니, 이것은 사람을 보고 그 말을 버리지 아니한 의리입니다.
若國之禁天主聖敎者, 其意何居, 初不問義理之如何, 以至寃極, 痛之說歸之邪道, 置之大辟之律, 辛酉前後, 人命大損, 而無一人査考其源流.
나라에서 천주성교(聖敎)를 금하는 것은 그 뜻이 어디에 있는 것이옵니까? 먼저 의리가 어떠한지를 묻지도 아니하고, 지극히 원통한 말로써 사도(邪道)로 몰아 대벽(大辟; 사형)률로 처치하여, 신유년을 전후하여 인명을 크게 손상시키면서도, 그 교리의 연원과 유전(流傳)에 대하여 조사하고 살피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噫, 爲學者, 將爲儒門之害歟. 將爲黔首之亂歟. 是道也, 自天子達于庶人, 日用常行之道, 則不可謂, 爲害爲亂也.
오호라! 이 도리를 배우는 자가 장차 유교에 해를 끼친다는 것입니까? 또는 장차 백성들을 어지럽게 한다는 것입니까? 이 도리는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쓰고 언제나 행하여야 할 도리인 것이오니, 해가 된다거나 어지럽게 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玆敢畧言, 其道理之不非. 夫天地之上, 自有主宰, 厥有三證焉. 一曰萬物, 二曰良知, 三曰聖經.
이제 감히 이 도리가 그릇되지 아니함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릇 천지의 위에 주재하시는 분이 계시는데, 여기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는 만물(萬物)이요, 둘째는 양지(良知)요, 셋째는 성경(聖經)입니다.
何謂萬物, 請以房屋喩之彼房屋也. 有柱石有樑椽有門戶有墻壁, 間架不失尺寸, 方圓各有制度. 若曰, 柱石樑椽門戶墻壁,渾然相合, 兀然自立, 必曰, 狂人之言也.
어찌하여 만물을 증거로 말하겠습니까? 청컨대 집과 방으로 비유해 보겠습니다. 건물에는 기둥과 주춧돌이 있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있으며, 문과 창이 있고, 담과 벽이 있습니다. 그 사이에 세워져 있는 것들은 한 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으며, 모나고 둥근 것이 각각 제도(制度)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기둥과 주춧돌과 대들보와 서까래와 문과 창과 담과 벽이 뒤섞여서 서로 합쳐져 가지고 저절로 오뚝 일어섰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미친 사람의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夫天地大房屋也. 飛者, 走者, 動者, 植者, 奇奇妙妙之像狀, 豈有自然生成乎.
무릇 천지는 큰 건물입니다. 나는 것, 뛰는 것, 동물, 식물과 기기묘묘한 형상들이 어찌 저절로 생겨난 것이겠습니까?
若果自然則, 日月星辰, 何以不違其躔次. 春夏秋冬, 何以不違, 其代序乎. 與廢榮枯宰制者誰, 福善禍淫, 主張者誰. 上天地載無聲無臭, 擧世之人, 暗行摘塡, 歸之自然,是何異於遺子, 不見其父, 不信其有父也哉.
만약 저절로 이루어졌다면 해와 달과 별이 어떻게 그 별자리의 궤적을 그르치지 아니하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어떻게 그 바뀌는 순서를 어기지 아니하겠습니까? 흥하고 망하며 번영하고 시드는 것을 지배하는 이가 누구이며,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음란한 자에게 화를 주는 것을 맡으신 이는 누구이겠습니까? 우러러보는 하늘은 아무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으니, 온 세상 사람들이 이를 보지 못하였다고 자연히 이루어진 것이라과 한다며, 이것이 어찌 유복자(遺腹子)가 그 아비를 보지 못했다 하여 그 아비 있음을 믿지 아니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世人見一篇奇文, 一幅名畵欽慕讚歎, 必問何人才能, 斷不凡忽㸔過. 宇宙萬物藝藝職職林林葱葱者亦一奇文名畵, 而自古及今寥寥沁沁獨不聞作者何哉. 世間事物俱不出於質貌作爲四字. 質者材料也. 貌者形狀也. 作者工匠也. 爲者需用也. 近取諸身, 遠取諸物, 莫不皆然.以若介大天地豈無作者. 此以萬物而知有主宰也.
세상 사람들이 한 편의 뛰어난 글이나 한 폭의 명화를 보면 흠모하고 찬탄하며 반드시 어떤 사람의 재능으로 된 것인가를 물어보며, 결코 범상하고 소홀하게 보아 넘기지 아니합니다. 우주의 만물이 가지각색으로 한없이 많은 것도 역시 뛰어난 글이요 훌륭한 그림이거늘, 예로부터 이제까지 안타깝게도 이에 대해서만은 그 지은 자를 묻지 아니함은 무슨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질(質), 모(貌), 작(作), 위(爲)의 넉 자를 벗어나지 아니합니다. 질이라는 것은 재료이고, 모라는 것은 형상이며, 작이라는 것은 만드는 이고, 위라는 것은 쓰임입니다. 이 이치를 가까이는 자기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더라도 모두 그렇지 아니한 것이 없거늘 이처럼 위대한 천지에 어찌 그 지은이가 없겠습니까? 이것이 만물을 통하여 주재하는 이가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何謂良知, 若夫白晝晦暝雷電相薄, 雖孩提便知奮畏瞠目, 累足置身無知此, 可知賞罰善惡之大主宰印在心頭矣. 閭巷間愚夫愚婦若遇蒼黃窘急之勢, 悲痛怨恨之時, 必呼天主而告之, 此其本然之心,秉彛之性有不得掩者. 故不敎而知, 不學而能. 但不知何以事之而畏之則均然. 此以良知而知有上主也.
어찌하여 양지(良知; 타고난 지혜, 양심)를 증거로 말하겠습니까? 만약 밝은 낮이 캄캄해지고, 천둥과 번개가 연이어 치면,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두려워 떨며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오금이 저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합니다. 이로써 상벌과 선악을 주관하시는 큰 분이 마음 속에 새겨져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민간의 우매한 남자나 여자들도 만약 당황하고 막다른 지경이나 슬프고 억울한 때를 만나면 반드시 천주를 불러서 호소합니다. 이것은 본래의 마음과 떳떳한 성품을 가릴 수가 없기 때문에 가르치지 않아도 알고,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떻게 섬길지를 몰라서 두려워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이것이 양지로써 하늘에 주재하는 분이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何謂聖經, 古之堯舜禹湯文武周孔之傳, 亦有經史而來也. 若非經史, 則誰知有堯舜禹湯文武周孔之傳, 何心法設, 何典章乎心法也. 典章也, 載之竹帛布在方冊. 故視爲可則信如金石. 惟我聖敎之傳, 亦有經典而來也. 自開國以來史不絶, 書古經新經,班班可考. 至今家誦而戶絃, 汗牛而充棟, 曾少無舛錯我國之人.
어찌하여 성경(聖經)을 증거로 말하겠습니까? 고대의 요,순,우왕, 탕왕, 문왕, 주공, 공자도 경전과 사서가 있어서 전래하였습니다. 만약 경전과 사서가 없었다면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공자가 어떠한 심법(心法)으로 전하였고, 어떠한 전장(典章)을 베풀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심법과 전장이 죽백(竹帛; 죽간과 비단)에 실려 있고, 책에 적어 놓았기에 읽으면서 옳다 하고, 금석처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성스러운 가르침도 역시 경전으로 전래되어 오고 있습니다. 세상이 생긴 이래로 역사의 기록이 끊김없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기록되어 상세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집집마다 외우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소가 땀을 흘릴만큼 많이 실어다가 온 집안에 가득 채우더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해가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以此等文字, 不少槪見於中國經史疑焉. 中國經史亦不云乎. 易曰以享上天, 詩曰昭事上帝, 書曰禋于上帝, 夫子曰獲罪于天無所禱也. 有所謂敬天畏天順天奉天之說. 雜出於諸子百家之書, 是何患乎西史之不來. 設或西史之來, 雖在上古而堯之洪水, 秦之刼火湮滅,無傳必矣. 迨至孫吳, 赤烏年間, 得鐵十字, 唐之貞觀九年, 景敎大治. 上自朝箸, 下至草野, 一濟崇事剏祭祀, 立景敎碑. 大賢如魏徵, 房玄齡,篤信而無疑. 大明萬曆年間, 西士來遊, 多著述至今流傳於中國. 上主黙祐東方, 東邦之幸同福爲奇, 今焉五十有餘年矣. 此以聖經, 而知有主宰也.
이러한 글귀가 중국의 경전과 사서에서 전혀 보지 못하였다고 해서 의심하지만, 중국의 경전과 사서에서도 말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주역(周易)에는 ‘상천(上天)에 바치나이다’라 말하였고, 시경(詩經)에는 ‘상제(上帝)께 아뢰나이다’라 말하였으며, 서경(書經)에는 ‘상제께 제사드리나이다’고 하였고 공자께서는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라고 말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하늘을 공경한다. 하늘을 두려워한다. 하늘을 따른다, 하늘을 받든다는 말이 제자백가의 서적 속에 여기 저기 나타나고 있으니, 서양의 사서가 오지 않았더라도 무엇이 걱정되겠습니까? 설령 서양의 사서가 왔다 하더라도 요 임금 때의 큰 홍수와 진시황 때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사라져서 전해오지 못한 것이 확실합니다. 손권의 오나라 때에 이르러 적오년간에 쇠 십자가가 발견되었고, 당나라의 정관 9년에는 경교가 크게 번창하여 위로는 조정의 대신들로부터 아래로는 초야(草野)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받들고 섬겨서 크게 제사를 드리고, 경교비를 세웠습니다. 위징(魏徵)과 방현(房玄齡)령과 같이 위대한 어진이들도 독실히 믿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습니다. 명나라의 만력연간에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와 저술한 서적이 많이 있어 지금까지 중국에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는 천주께서 묵묵히 동방을 도우심이고, 우리나라에 다행한 일이니, 그 행복을 함께 함은 신기한 일로서 이제 벌써 50여 년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통하여 주재하시는 이가 계심을 알리는 것입니다.
擧此三證, 旣然明知有主宰則當知, 上主聖造天地萬物, 將欲通其福顯其德. 造天而覆我, 造地而載我, 造日月星辰光照我, 草木, 禽獸, 金銀銅鐵, 享用我, 自出母胎, 至於長成, 種種洪恩, 如是罔涯, 人之本分, 當如何哉. 若戴天履地, 而穿吃而已, 則孤負生民之洪恩, 莫此爲甚也. 譬如爲人父者, 造房屋辦産業, 給其子享用, 其子處其房屋, 用其産業肆然, 自大不知事親之道, 報本之意則孝乎不孝乎.
이 세 가지 증거를 들어서 주재자가 계심을 이미 명확히 알았으니, 하늘의 주성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고, 장차 복을 보내주시고 그 덕을 나타내려 하심을 마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주재자께서 하늘을 만드셔서 우리를 덮으시고, 땅을 만드셔서 우리를 실으시며,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셔서 우리를 비추시고, 초목과 금수와 금, 은, 동, 철물 들을 우리가 누려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모태에서 나와서 장성할 때까지, 여러 가지 큰 은혜를 이와같이 한없이 내려 주시니, 사람의 본분은 마땅히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고 살면서, 입고 먹기만 한다면 인류를 내신 큰 은혜를 저버림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견주어 보건데 사람의 아비된 자가 집을 짓고 살림을 마련하여 그 아들에게 주어서 누려 쓰게 하였더니, 그 아들이 그 집에 살고 그 살림을 쓰면서 함부로 하여 제가 잘난 체하고,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와 근본에 보답하는 뜻을 모른다면, 이것이 효도하는 것이겠습니까? 불효하는 것이겠습니까?
人之處世, 秋毫皆帝力也. 生養助顧之, 保護引導之, 身後受賞存, 而勿論現受之, 恩已極無比. 吾人之没身, 奉事當如何, 而可答萬一也. 奉事之道, 非高遠難行之事, 非索隱行怪之類也. 但改過自新, 遵帝誠命而已.
인간이 사는데 쓰이는 이 세상의 털끝만한 것도 모두가 천주의 힘입니다. 낳으시고 기르시며, 돕고 돌보시며,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죽은 후에 받을 상은 두고 말하지 않더라도, 현재 받고 있는 은혜가 이미 지극한 것이니 비할 바가 없습니다. 우리가 온 몸을 다하여 받들어 섬기기를 마땅히 어떻게 해야만 그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받들어 섬기는 도리라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고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며, 이상한 일을 찾아서 기괴한 일을 하는 따위도 아니고, 다만 잘못을 고침으로 스스로 새로워져서 천주의 계명(誡命)을 지키는 것일 따름입니다.
誡命者何, 上主黙喩之十誡也.
一, 欽一天主萬有之上.
二, 無呼天主聖名以發虛誓.
三, 守瞻禮之日.
四, 孝敬父母.
五, 毋殺人.
六, 毋行邪淫.
七, 無偷盜.
八, 妄證.
九, 毋願他人妻.
十, 毋貪他人財物.
계명이란 무엇인고 하니, 천주께서 계시로써 가르치신 열가지 계율입니다.
첫째, 하나이신 천주를 만유(萬有) 위에 흠숭하라.
둘째, 천주의 거룩한 이름을 불러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셋째, 첨례(瞻禮)날을 지켜라.
넷째, 효도하여 부모를 공경하라.
다섯째, 사람을 죽이지 말라.
여섯째, 사음을 행하지 말라.
일곱째, 도적질을 하지 말라.
여덟째,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아홉째,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열째,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右十誡摠歸二者, 愛天主萬有之上, 及愛人如己. 上三誡,昭事之節目也. 下七誡, 修省之工夫也. 顔氏之四勿, 載記之九思, 不足比方, 忠恕孝悌仁義禮智, 包括這裡有, 何一毫不足處乎. 以是道而行乎一家, 則家可齊矣. 行乎一國, 則國可治矣. 行乎天下, 則天下可平矣.
이상의 열 가지 계율을 종합하면 두 가지로 귀결되니, 즉 천주를 만유 위에 사랑하고, 남을 자기와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앞의 세 가지 계율은 천주를 밝혀 섬기는 절차이며, 다음의 일곱 가지 계율은 자기를 닦아 성찰하는 공부입니다. 안씨(顔氏)의 네 가지 하지 말라는 것과 재기(載記)의 아홉 가지 생각도 여기다 견주기에 부족하며 충성, 용서, 효도, 우애,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이 속에 모두 포괄되어 있으니, 어찌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모자라는 곳이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한 집안에 행하면 그 집안이 정돈될 것이고, 한 나라에 행하면 그 나라가 잘 다스려질 수 있으며, 천하에 행하면 천하가 태평할 것입니다.
十誡之中, 不可犯一, 而非徒身犯,尤禁心犯. 大凡人之過失, 作於其心. 害於其事, 治世之法, 可治其事, 不治其心, 天主之誡, 非徒治其事, 亦治其心, 然而人心惟危, 道心惟微頃刻犯罪, 私慾偏情百方引誘,誘以驕傲, 誘以憤怒, 誘以貪饕, 誘以邪淫, 誘以嫉妬, 誘以慳吝, 誘以懈怠. 䧟人於必死之地. 苟不時時警斥刻刻攻退則不免於羅穿. 終身相戰戰無移時戰勝則成功, 不勝則抵罪, 功罪之判卽身死之日也. 天主至公無善不報天主至義無惡不罰. 若身死之後, 魂亦隨滅, 則賞也罰也,施於何所乎. 又當知, 靈魂之不滅也.
열 가지 계율 가운데에서 한 가지라도 범할 수 없으며, 몸으로 범하기 뿐 아니라, 더욱 마음으로도 범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무릇 사람의 잘못은 그 마음 속에서 일어나서 그 행동을 그르칩니다. 세상을 다스리는 법률은 그 행동을 다스릴 수 있으나, 그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나, 천주의 계명은 행동을 다스릴 뿐 아니라 또한 그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리를 따르는 마음은 미약하기만 하여, 자칫하면 죄를 범하게 됩니다. 사욕과 치우친 감정이 백방에서 유혹하니, 곧 오만으로 유혹하고, 분노로 유혹하고, 탐욕으로 유혹하고, 사음으로 유혹하고, 질투로 유혹하고, 인색함으로 유혹하고, 게으름으로 유혹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을 죽음으로 빠뜨리게 됩니다. 이러한 유혹을 시시각각으로 경계하고 물리치지 않는다면 죄악의 구렁텅이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을 때까지 유혹과 싸우고 또 싸우되 느슨해서는 아니되고, 싸워서 이기면 공을 이룰 것이요 싸움에 지면 죄를 짓게 될 것이니, 공로와 죄악의 판결은 육신이 죽는 날에 내려질 것입니다. 천주께서는 지극히 공정하시니 선함이 없으면 보답도 없을 것이요, 천주께서는 지극히 의로우시니 죄악이 없으면 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만약 육신이 죽은 뒤 영혼까지 따라 없어진다면 상이나 벌을 누구에게 내리겠습니까? 이는 또한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히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盖魂有三焉, 一生魂, 二覺魂, 三靈魂也. 生魂者草木之魂也, 能長生而無知覺. 覺魂者禽獸之魂也, 能知覺而不知義理也是非也. 靈魂者人之魂也. 能生能長能知能覺能分辨是非能推論道理. 於萬物之中, 惟人最貴所貴乎人者以其魂之靈也. 卽所謂天命之謂性, 而賦界于胎中者也. 烏可與草木禽獸, 同歸於杇腐乎.
무릇 혼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혼(生魂)이고, 둘째는 각혼(覺魂)이며, 셋째는 영혼(靈魂)입니다. 생혼이라는 것은 초목(草木)의 혼으로서 나서 자랄 수 있으나 지각(知覺)하지 못하는 것이며, 각혼이라는 것은 금수(禽獸)의 혼으로서 지각을 할 수는 있으나 의리를 모르고 옳고 그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영혼이라는 것은 사람의 혼입니다. 이는 날 수도 있고, 자랄 수도 있고, 지각할 수도 있고, 감각할 수도 있으며,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고 도리를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고귀하며 이는 그 혼이 영험한 까닭이니, 이는 이른바 하늘이 내려주신 성품이며, 사람이 태중에 있을 때 부여받은 것이니, 어찌 영혼이 초목과 금수와 같이 썩어서 없어지겠습니까?
先儒亦知, 魂之有三, 而靈之不滅. 故曰, 三魂屢散. 又魂升, 魄降, 其魂有三焉. 而靈魂之不死明矣. 旣爲不死不滅, 則究竟何徃. 善者靈魂升天, 而受賞惡者靈魂入地, 而受罰賞者天堂之永福,罰者地獄之永苦也. 若以不見天堂, 不見地獄, 不信其有堂獄, 則是何以異於瞽者之不見天, 而不信天有日也哉. 事之合理者不見, 而可信不合於理者, 雖見不可信也. 故事之可信與不可信, 不係於見不見, 而惟在於合理與不合理而已. 苟能合理, 則千歲之日至可坐而致之也. 奚必於吾身親見之哉.
옛 유학자들 역시 혼이 세 가지가 있고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옛말에 “삼혼은 여러 번 흩어진다." 또는 “혼은 올라가고 백은 내려간다.”, “혼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영혼이 죽지 아니함은 맹백합니다. 이미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 않는다면 필경에는 어디로 가겠습니까? 착한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의 영혼은 땅으로 들어가 벌을 받게 되는 것이며, 상이라는 것은 천당(天堂)의영원한 행복이요, 벌이란 것은 지옥(地獄)의 영원한 고통입니다. 만약 천당을 보지 않고 지옥을 보지 아니하였다고 천당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아니하면 눈먼 자가 하늘을 보지 아니하였다 하여 하늘에 해가 있음을 믿지 아니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일이 이치에 합당하면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고, 이치에 합당하지 아니하면 비록 보일지라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믿을 수 있고, 믿을 수 없음은 보고 못 보는 데에 매이지 않고, 다만 이치에 합당함과 합당하지 않음에 있을 따름입니다. 실로 이치에 합당하면 천 년 뒤 동짓날도 가만히 앉아서도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필 내 몸소 친히 보아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夫一國之中, 必有賞罰, 有功者陞之縻以爵祿, 給以金帛. 有罪者黜之囚之 ,犴狴施以力鉅, 一國之君尙有賞罰之權. 况天地大君乎, 其賞非世間爵祿之可比, 而永遠無窮之福也. 其罰非世間狂狴力鉅之可比而, 永遠無盡之苦也. 升降一定更無移見.
무릇 한 나라 안에도 상과 벌이 반드시 있는 법인데, 공로가 있는 자는 조정에 불러 올려 벼슬과 녹을 내리고 황금과 비단을 줍니다. 죄가 있는 자는 쫓아내고 옥에 가두거나 또는 사형에 처하니, 이처럼 한 나라의 임금에게도 상벌의 권한이 있습니다. 하물며 천지의 큰 임금은 어떠하겠습니까? 그 상은 이 세상의 벼슬과 녹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 무궁한 행복입니다. 그 벌도 이 세상의 징역과 사형에 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통입니다. 천당에 오르고 지옥에 내려가는 것이 한 번 결정되면 다시는 변경할 수가 없습니다.
嗚呼,世人明知靈魂之不死,而不知居於何所,豈不哀哉. 然有永賞永罰,則世事虛幼以可知矣.
오호라! 세상 사람이 영혼이 죽지 않음을 환하게 알면서도 영혼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인 줄을 모르니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이와같이 이미 영원한 상과 영원한 벌이 있으니, 세상의 일은 헛된 환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人壽多, 不過百年, 而汨於利, 慾傷中未得之, 患得之, 旣得之患失之, 不知老之, 將至此身一死,當貴功名竟歸虛地. 况富貴功名一生求之不得者乎, 何其塵夢之難醒也.
사람의 수명이 길다 해도, 백 년을 넘지 못하는데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이니, 사리사욕에 빠져서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걱정하고, 이미 얻은 것은 잃을까 걱정하다가 늙음이 닥쳐오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마침내 이 몸이 한 번 죽으면 부귀공명이 필경에는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요, 하물며 부귀공명을 일평생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사람조차도 그 티끌같은 꿈을 깨기가 어찌 그리 어렵습니까?
嗚呼, 世福缺, 而不全天福全, 而不缺世福暫, 而不永天福永, 而不暫與其求缺, 且暫之世福曷若求全, 且永之天福乎.
오호라! 이 세상의 행복은 부족하여 온전하지 못하며, 하늘의 행복은 온전하여 부족함이 없고, 이 세상의 행복은 잠시 뿐이나 하늘의 행복은 영원하며, 부족하며 잠시뿐인 이 세상의 행복을 구하는 것이 완전하고 영원한 천상의 복을 구하는 것과 어찌 같을 수 있겠습니까?
雖未得天堂之永福, 若無地獄之後患, 則暫世暫榮容或可圖, 而奈此地獄之永罰何哉. 在世之時, 朦然不覺, 身死之後, 悔之何及, 是以斧銊在前鼎鑊在後, 而毅然不屈者代不乏人. 此足爲眞敎之一證.
비록 천당의 영원한 행복을 얻지 못할지라도, 만약 지옥의 후환이 없다면 덧없는 세상의 영화를 잠시 도모하여도 좋겠지만, 이 지옥의 영원한 벌을 어찌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다가 육신이 죽은 뒤에 뉘우친들 이미 때는 늦으니, 이 때문에 목을 끊는 큰 도끼가 앞에 있고 몸을 삶을 큰 솥이 뒤에 있더라도 꿋꿋하게 굽히지 아니하는 자가 대대로 적지 않습니다. 이것으로도 넉넉히 참된 가르침의 한 가지 증거가 될 것입니다.
一言弊曰, 至聖, 至公, 至正, 至眞, 至全, 至獨, 唯一無二之敎也.
한 마디로 말하면 지극히 거룩하고, 지극히 공번되고, 지극히 바르고, 지극히 참되고, 지극히 온전하며, 지극히 절대적인 오직 하나이고 둘도 없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何謂至聖之敎會, 天主親立之敎也. 自古列聖, 繼繼相承闡其義理, 定其規矩, 而至致命以證之可謂至聖矣.
어찌하여 지극히 거룩한 교회라 이르는가 하면, 천주께서 친히 세우신 가르침인 까닭입니다. 예로부터 여러 성인(聖人)들이 대대로 뒤를 이어 그 올바른 이치를 천명하였고, 그 법도를 바로 세워 생명을 바쳐서 증거하기에 이르렀으니, 지극히 거룩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何謂至公, 無論貴賤賢愚男女老少, 東西南北之人. 皆可當行之道也, 可謂至公矣.
어찌하여 지극히 공번되다고 이르는가 하면, 신분의 귀천,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남녀노소, 동서남북의 사람을 막론하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마땅히 실행하여야 할 도리이므로 지극히 공번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何謂至正 ,廣大明白, 蕩蕩平平, 無一毫偏依之行, 回正之事, 可謂至正矣.
어찌하여 지극히 바르다고 이르는가 하면, 광대하고, 명백하며, 탕탕평평해서 터럭만큼도 치우친 행위나 올바름을 굽히는 일이 없으므로 지극히 바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何謂至眞, 天下未有無敎之國, 而敎不眞者多矣. 老莊失之於虛無,仙佛失之於幻妄, 外此百家方術, 不足掛齒, 而聖敎道理則眞實無僞永不舛錯可謂至眞矣.
어찌하여 지극히 참되다고 이르는가 하면, 천하에 종교가 없는 나라는 없으나 그 가르침이 참되지 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노자와 장자는 허무에서 참됨을 잃었고, 선도(仙道)와 불교는 환상과 망상에서 참됨을 잃었으며, 이밖에 군소 사상가들의 방술은 입에 담을 가치도 없으나 성교(聖敎)의 도리는 진실하여 거짓됨이 없어 영원히 그르치지 아니하므로, 지극히 참되다 말할 수 있습니다.
何謂至全, 譬於草木, 異敎則或有幹而無枝, 或有葉而無花, 或有花而無實, 首尾不能相連, 終始不能接續, 而惟聖敎則有幹有枝有葉有花有實. 天地鬼神人事之始末, 已往現在未來之前後, 渾然畢具可謂至全矣.
어찌하여 지극히 온전하다고 이르는가 하면, 초목으로 비유하면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는 어떤 것은 줄기가 있는데 가지가 없고, 어떤 것은 잎이 있는데 꽃이 없고, 어떤 것은 꽃은 있는데 열매가 없어 머리와 꼬리가 서로 연결될 수 없어 시작과 끝도 서로 이어질 수 없으나 오직 성교(聖敎)만은 줄기가 있고, 가지가 있고, 잎이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즉 천지(天地)와 귀신(鬼神)과 인사(人事)의 처음가 끝,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가 가지가지로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지극히 온전하다 이를 수 있습니다.
噫, 指金玉, 而强謂之瓦礫, 用蒭豢, 而强謂之糟糠, 亦將奈何. 又曰, 無父無君, 不知聖敎之義也. 十誡之第四, 孝敬父母夫, 忠孝二字, 萬代不易之道也. 養志, 養體,人子之當然, 而奉敎之心, 尤功謹愼. 故事盡其禮, 養盡其力, 忠移於君許身, 殞命赴湯蹈火有不敢避. 不如是則, 有違敎誡, 此果無父無君之學耶.
아아 탄식하도다! 금과 옥을 가리켜 억지로 기와라 자갈이라 이르고, 먹어서 이로운 것을 억지로 못먹는 찌꺼기라 이르니, 이 일을 장차 어찌하여야 합니까? 또 말하기를 아비와 임금도 업신여긴다 하니 이는 성교(聖敎)의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열 가지 계명의 넷째가 효도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며 무릇 충과 효의 두 글자는 만대에 변할 수 없는 도리입니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그 육신을 봉양함은 사람의 자식으로서 당연한 일이로되, 교를 믿는 사람은 더욱 절실히 삼가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김에는 그 예를 다하고, 부모를 봉양함에는 그 힘을 다하며, 충성을 임금에게 바칠 때에는 자기의 몸을 바쳐 끓는 물 속에 들어가며, 타는 불을 밟더라도 감히 피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되니, 이리하여도 과연 아비와 임금을 업신여기는 배움이 됩니까?
但國君禁之, 而民有行之者, 家父禁之, 而子有行之者, 其以是說而然歟. 是亦有說焉. 位有尊卑事有輕重, 一家之中, 家父最重, 而尊於家父者國君也. 一國之中, 國君最重 ,而尊於國君者, 天地大君也.
다만 나라의 임금께서 금하는데도 백성 가운데 실행하는 자가 있고, 집안의 아비가 금하는 데도 자식이 실행하는 자가 있으니, 이러한 말을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까? 이것도 또한 설명하고자 하면, 지위에는 높고 낮음이 있고, 일에는 가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니, 한 집안 안에서는 집안의 아비가 가장 중하나, 한 나라 안에서는 집안의 아비보다 높은 것이 나라의 임금이요, 한 나라 안에서는 나라의 임금이 가장 중하나, 나라의 임금보다 높은 것은 천지의 큰 임금이십니다.
聽家父之命, 而不聽國君之命, 則其罪重矣. 聽國君之命, 而不聽天地大君之命, 則其罪尤極無比. 然則, 奉事天主, 非欲故違君命, 出於不得已者. 擧此一者, 遂謂之無父無君可乎.
집안 아비의 명령을 듣지만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가 무겁습니다. 나라 임금의 명령을 들으면서 천지의 큰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그 죄는 더욱 심하여 비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주를 받들어 섬김은 임금의 명령을 일부러 어기려는 것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사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한 가지를 들어서 아비를 업신여기고 임금을 업신여긴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습니까?
又曰, 通貨色夫, 通貨者, 自古有國有家者, 不可一日, 無之之事也. 有無相通, 然後生民相資而生也. 若無通貨之法, 則一國之中生者幾何, 此其不美之法也. 反爲可禁之事耶.
또 말하기를, 재물을 유통하고 색정을 나눈다고 하는데, 자고로 재물을 유통하는 것은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고 가정을 다스리는 사람에게는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유통해야만 백성들이 서로 의지하고 생활합니다. 만약 재물을 유통하는 법이 없으면 온 나라 안에서 살아남을 자가 몇이나 될 것이며, 이를 좋지 못한 법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이를 금해야 될 일이겠습니까?
所謂通色者, 禽獸尙有不然者, 况歸之於聖敎哉. 十誡之第六曰無行邪淫, 第九曰無願他人妻, 第六誡以身犯之也, 第九誡以心犯之也. 聖敎之嚴禁邪淫, 如是重復, 而反以通色之說加之, 豈有如此逆倫亂常之敎乎.
소위 말하기를, 여자를 서로 통정한다고 하는 데, 금수(禽獸)도 오히려 그렇게 아니하거늘, 하물며 그것을 성교(聖敎)를 믿는 우리에게 그런 비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열 가지 계명의 여섯째에 사음(邪淫)을 행하지 말라 하였고, 아홉째에 남의 아내를 원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여섯 번째 계명은 몸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요, 아홉째 계명은 마음으로 범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성교(聖敎)가 사음을 엄히 금함이 이와같이 거듭 강조하는데도 도리어 여자를 서로 통정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으나, 어찌 이와같이 윤리를 거스리고, 질서를 어지럽히는 가르침이 어디 있겠습니까?
道之眞假, 事之曲直, 置之一邊, 以不近不當之說, 排之擠之, 豈非以外國之道而然歟. 金不擇地, 惟精是寶, 道不拘方, 惟聖是眞以其道之傳, 豈有此疆彼界之畦畛也. 中國則各國之人物, 往來相通, 沙門之學任之所爲, 外國之人多有來居, 而曾不知禁也.
도리의 참되고 거짓됨과 사리의 바르고 그릇됨을 한쪽으로 치워놓고, 얼토당토아니한 말을 가지고 배척하며 막으니, 이는 외국의 도리라 하여 그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은 산지(産地)을 가리지 않고 오직 순수한 것만 보배가 되는 것이니, 도리 역시 지역에 구속되지 않고, 오직 거룩함이 참된 것이니, 그 도리가 전래함에 있어서 어찌 이 나라 저 나라의 경계가 있겠습니까? 중국은 각 나라의 사람들이 오고 가며 서로 교제를 하며, 불교의 학문도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으며, 외국인이 와서 사는 이가 많아도 일찍이 금지하지 않았습니다.
至於我國, 佛道之爲害久矣. 八路梵宮釋殿最極奢侈, 金佛銅像浪費財力. 彼佛氏者西域中異端也. 剽竊聖敎之文字, 依樣聖敎之規矩, 義理舛錯倫紀絶倒, 此所謂亂朱之紫, 亂苗之莠也. 虛張禍福, 恐喝愚民, 今成怪弊.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불교의 해악이 오래 되었습니다. 전국에 있는 사찰의 건축은 사치를 극을 다하였으며, 금불상과 동상으로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저 불교라는 것은 서역의 이단입니다. 성교(聖敎)의 글을 표절하였고, 성교(聖敎)의 규칙을 본땄으나, 의리는 그르쳐 어지럽고, 윤리는 끊어져 기강은 뒤집혔으니, 이것은 이른바 붉은 빛깔을 망치는 자줏빛이며, 못자리를 망치는 가라지풀입니다. 헛된 화복의 말을 떠벌여 어리석은 하층 백성을 공갈하니 이제는 괴상한 폐단이 되었습니다.
至於巫覡, 風水, 筭命, 㸔相等人誕惑婦孺侵漁錢財視若平常, 而聖敎則獨不蒙包容之恩何哉. 爲害於家乎, 爲害於國乎, 觀其事而察其行, 則可知其人之如何, 其道之如何, 此軰曾爲不軓乎, 曾爲偷乎, 曾爲奸淫乎, 曾爲殺越乎.
무당, 풍수, 점쟁이, 관상쟁이 같은 사람들도 부녀자와 아이들을 속이고 미혹하게 하여, 금전과 재물을 뺏는 것을 예사스럽게 보면서, 오직 성교(聖敎)만이 포용하는 은혜를 입지 못하는 것은 어찌 된 일입니까? 가정에 해를 끼쳤습니까? 나라에 해를 끼쳤습니까? 그 하는 일과 그 행실을 살피면,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으며, 그 가르침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으니, 저희가 일찍이 역적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도적질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간음을 하였습니까? 일찍이 살인을 하였습니까?
又多法外施行, 使之背返天主. 夫天主, 乃萬物之大父母, 大主宰也. 古昔聖賢, 昭事對越, 今之人, 何故詬罵凌辱當此. 饑饉荐臻家國困悴之際, 惟我嗣王霄衣旰食, 發政施仁好生之德, 洽于民心.
또한 법에도 없는 일을 시행해 천주를 배반케 하는 일이 많습니다. 무릇 천주께서는 만물의 큰 어버이요, 큰 주재자이십니다. 옛날의 성현들도 열심으로 섬기고 제사를 드렸건만, 오늘날의 사람은 어찌한 까닭으로 능욕(凌辱)을 당하고 있습니까? 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어 어려울 때, 임금께서는 밤낮으로 잠도 제대로 못자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며 어지심을 베풀어 백성을 아끼는 덕을 백성이 마음으로 알게 합니다.
噫, 彼聖敎之人獨非吾王之赤子耶. 哀此, 人斯何至此極而不少恤哉. 獄中之斃, 門戶之斬, 連續不絶, 泣血成渠哭聲漲天, 父呼其子, 兄呼其弟, 如窮人之無所歸, 淸明之世, 此何光景. 夫損生致命, 證主眞敎, 顯主光榮, 吾儕分內事矣. 身亦將死之類也. 遇此敢言之時不一次仰首長呼啼而愍黙就死則山積之懷將無以自暴於百世之下.
아아! 저 성교(聖敎)를 믿는 사람들만이 우리 임금님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슬프도다! 이 사람들을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러도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옥 안에서는 지쳐서 죽고, 성문 밖에서는 목을 베어 죽임이 연달아 끊이지 아니하여 눈물과 피가 도랑을 이루고 곡성(哭聲)이 하늘에 이르고, 아비는 자식을 부르고, 형은 아우를 부르짖으니, 마치 돌아갈 곳 없는 궁핍한 사람과 같이 되었으니, 청명한 이 세상에, 이 무슨 광경입니까? 무릇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쳐서 천주의 참된 가르침을 증거하고, 천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몸 역시 장차 죽고 말겠지만, 감히 이런 말씀을 드릴 기회를 만나 한 번 고개를 들고 외쳐보지 못하고 슬프게 입을 다물고 죽음에 나간다면 산적한 이 회한을 장차 백세 뒤까지 밝힐 길이 없을 것입니다.
伏乞, 時燭俯覧詳辨道理之眞僞邪正然後, 上造朝廷, 下布民庶, 一變至道弛禁撤捕放釋獄囚, 與一國之民, 安土樂業, 共享太平, 千萬企望, 千萬企望.
엎드려 비옵건데, 각별히 불을 밝혀 상세히 살펴보신 후 도리의 진위(眞僞)와 그릇됨인지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하신 연후에, 위로는 조정에 아뢰고, 아래로는 백성들에게 펼치시어, 마음을 돌이키시어 도리로 돌아와 금령을 늦추시고 체포령을 거두시며 갖힌 이들을 풀어주시어, 일반 백성들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태평을 누릴 수 있기를 천번만번 바라고 또 바랍니다.
又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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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人跟前, 薦酹酒食, 天主敎之所禁也. 生前靈魂不能芻享於盃飯, 况死後靈魂乎. 飮食肉口之供道德靈魂之粮, 雖至孝之子, 以甘旨之味, 不能供父母寢寐之前者, 寢寐非飮食之時也. 寢寐亦然,况大寐乎. 稻梁黍稷芬苾之果非虛則假爲人子者以虛假之禮豈事已亡之親乎.
죽은 사람 앞에 술과 음식을 차려 놓는 것은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살아 있을 동안에도 영혼은 술과 음식으로 모실 수 없거늘, 하물며 죽은 뒤에 영혼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음식은 육신 양식이요, 도덕은 영혼의 양식이니, 비록 지극한 효자라도 맛좋은 것이라 하여 부모가 주무실 때는 공향할 수 없는 것은, 잠들었을 동안은 먹고 마시는 때가 아닌 까닭입니다. 잠들었을 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영원히 잠들었을 때는 어떻겠습니까? 벼와 수수와 기장과 피(稷)와 향기로운 과일은 헛된 일이거나 거짓된 일이니,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 허위와 가식의 예로써 어찌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섬기겠습니까?
所謂, 士大夫木主, 亦天主敎之所禁也. 旣無氣脉骨血之相連, 又無生養劬勞之上關矣. 父母之穪, 何等重大, 以工匠之所制造, 粉墨之所粧點, 因爲之眞父眞母乎, 正理無據, 良心不允, 寧得罪, 於士大夫, 不願得罪, 於天主敎.
이른바 사대부(士大夫)의 신주라는 것도 천주교에서 금하는 바입니다. 이미 신주는 부모의 기맥(氣脉)과 육신과 아무 연관이 없으며, 또한 낳아서 길러준 노고와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라 칭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거늘, 목공이 만들어 물감과 먹으로 칠하여 놓고 참아비와 참어미라고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치에 맞지 않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니, 차라리 사대부들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천주교에 죄를 얻고 싶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