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르나르도
마지막 교부, 양봉업자의 수호성인, 사제들에게 단호했던 별명이 많은 성 베르나르도(Saint Bernard)= 버나드, 베르나르두스
성인의 별칭은 많다.세기의 위인, ’세기의 골키퍼’ , ’세기의 화해자’ , 이제는 더 이상 어떤 편에서도 충격을 가하지 않는 ’세기의 정당한 공격수’등 너무도 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12세기의 인물’이다. 여기에는 아무런 의심도 논쟁도 없다. 이 위대한 인물은 바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다.
교황의 조언자, 제2십자군의 설교자, 신앙의 옹호자, 분열의 치료자, 수도원의 개혁자, 성서 학, 신학자이며 웅변적인 설교자, 어떤 명칭에서도 그는 보통 사람과는 구별이 된다. 이 모든 자자질이 있었음에도 베르나르도는 젊어서부터 은둔하는수도 생활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갖고 있었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창조하였으며 구원된 자로서 창조하였다. 그 사랑의 최상의 증거는 말씀의 강생이며 구원이다. 그 사랑의 또 다른 증거는 성모의 출현이다. 성모는 또한 구원의 위대한 계획안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이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시토수도회 출신으로 에크하르트(Eckehart), 단테, 프랑크푸르트 학파, 루터,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오라토리오회 등 16~19세기 영성주의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신학자 베르나르도(1090~1153)는 전형적인 「수도자적 신학」의 사상을 드러낸 인물로 꼽힌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새로운 유형의 사유를 도출해낸다기 보다 풍부한 내적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성서를 참고 자료로 삼았으며 그 다음은 교부들의 수도자 생활 규칙에 관한 저서들 특히 「베네딕도 규칙서」같은 것을 참고했고 「전례」도 참조했다.
특히 구원 사업안에서 마리아가 보였던 역할에 대해 깊이 있는 신학적 견해를 드러내 보였던 베르나르도는 또 「세례론」 등을 통해 성사 신학에 대한 입장을 언급하면서 『수세(水洗)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며 혈세(血洗)나 화세(火洗)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세례 받지 못한 유아들은 그들 부모의 신앙 덕분으로 의화(義化)될 수 있다』고 밝혔다.
학자들은 그의 수도 신비적인 사상과 관련 『베르나르도의 신학은 하느님께로의 인격적인 상승 체험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설명하고 『그의 교의적인 가르침과 수도적인 가르침은 분리될 수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수도생활에 미친 영향도 매우 크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관상 기도에 전념하도록 고무시켰으며 또 한편 시토회를 개혁과 확장의 대중 운동으로 발전시키면서 초기 시토회의 개념을 정착시켰다.
테셸랭 소렐(Tescelin Sorrel)과 몽바르(Montbard) 영주의 딸인 복녀 알레타(Aletha, 4월 4일)의 아들인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베르나르도)는 부르고뉴(Bourgogne) 디종(Dijon) 근교의 가족 성(城)인 퐁텐(Fontaine)에서 일곱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샤티용(Chatillon)에 가서 공부하면서 청운의 꿈을 펼치고 있었으나, 1107년 어머니의 죽음으로 많은 충격을 받고서 수도생활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원래 시토회의 설립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아니었지만 흔히들 그를 시토회의 설립자로 부른다.
그가 새로운 수도회인 시토회에 입회한 해는 1112년 4월인데, 그 때 그는 자기 형제 4명을 비롯하여 모두 30명의 친척, 친구들과 함께 베네딕토회 규칙의 엄격한 해석을 따르기 위하여 1098년에 설립된 시토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원장이던 성 스테파누스 하딩(Stephanus Harding, 4월 17일)으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1115년에 성 베르나르두스는 성 스테파누스 하딩의 지시에 따라 12명의 수도자와 함께 부르고뉴와 샹파뉴(Champagne)의 경계지역에 있는 클레르보라는 고립된 계곡에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파견되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엄격한 규율 때문에 약간의 어려움에 봉착하였으나, 그의 높은 성덕으로 수많은 제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때 그 수도원의 이름을 발레 답신트에서 클레르보로 바꾸었고, 당시 68개의 시토회 수도원의 모원으로 만들었다.
그 후 성 베르나르두스는 자신의 학덕과 지덕을 활용하여 수도원의 외부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유럽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 중의 하나가 되어 통치자와 교황의 자문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대립교황인 아나클레투스 2세의 요구에 대항하여 1130년의 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Innocentius II) 선출의 합법성을 지지하였다. 또한 그는 로테르 2세를 황제로 인정하도록 롬바르디아(Lombardia)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1140년부터 그는 공적으로 설교하는 일을 시작하여 놀라운 명성을 얻었다.
1145년에는 전에 클레르보 수도원의 수도자였던 에우게니우스 3세(Eugenius III)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그는 교황직의 의무에 대한 글을 교황 앞으로 보내어 로마(Roma) 교황청의 남용을 자제하고, 교황이 항상 목전에 두어야 할 종교적 신비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교황 에우게니우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랑그도크(Languedoc)에 파견하여 알비파(Albigenses) 이단을 대항하여 설교토록 하였고, 프랑스와 독일에 제2차 십자군 원정의 열기를 북돋우는 특사로 임명하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활동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성한 저술가로도 유명하다. 그의 서한과 "아마(Armagh)의 성 말라키아의 생애" 그리고 "신애론"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자신의 수도자들에게 행한 강론은 "아가"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저술과 설교에서 성서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 이유를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박아 주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저서와 신심은 오늘의 신자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고 있다. 그는 다양한 기질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꿀처럼 단 박사'(Doctor Mellifluus)란 칭호를 얻었다.
1153년 8월 20일 클레르보에서 선종한 그는 1170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Alexander III)에 의해 시성되었고, 교황 비오 8세(Pius VIII)는 1830년에 그를 교회학자로 선포하였다. 그는 스콜라 학파 이전의 신학자이며, 때로는 '마지막 교부'로 불리기도 한다. 그의 문장은 꿀벌통이고 양봉업(자)의 수호성인이다.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아가에 대한 강론'에서(Sermo 83,4-6: Opera omnia, Edit. Cisterc. 2[1958], 300-302)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많은 지향과 감정과 정을 지니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피조물은 사랑을 통해서만 창조주께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비록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과 같은 정도로는 못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통하여 같은 방법으로 보답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누구를 사랑하실 때 그 보답으로 사랑만을 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사랑함으로써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사랑하실 때 사랑을 받으시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을 두지 않으십니다.
신랑의 사랑은, 즉 사랑이신 신랑은 보답으로 다만 사랑과 성실을 찾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받는 사람은 보답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신부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 자체께서 사랑받지 못하면 되겠습니까?
신부는 자신의 모든 여타의 정을 포기해 버리고 자신의 전존재로 사랑에게만 헌신합니다. 신부는 보답으로 사랑을 줌으로써 사랑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 안에 자신의 전존재를 쏟아 낸다 해도 이것은 영원한 사랑의 원천에서 흘러 나오는 그 분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 자체이신 분, 영혼과 말씀이신 그리스도, 신부와 신랑, 피조물과 창조주, 그리고 목마른 사람과 샘에서 흘러 나오는 사랑은 그 풍요성에서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동일하지 않다 해서, 즉 경주에 있어서 거인과, 단맛에 있어서 꿀과, 온유함에 있어서 어린 양과, 순결에 있어 백합화와, 광채에 있어 태양과, 그리고 사랑에 있어서 사랑 자체이신 분과 겨루지 못한다 해서 혼인하는 이의 욕망과 애통하는 이의 갈망과 사랑하는 이의 열정과 간청하는 이의 희망이 사라지고 만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보다 더 작아서 그분보다 덜 사랑한다 해도 힘을 다해 사랑한다면 부족함이 없고 있을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랑하는 이는 주님과 혼인했습니다. 이 정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완전한 혼인이란 양 배우자가 서로 합의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먼저 또 더 위대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시토 수도원
시토는 보르고뉴 지방의 랑그르에서 사롱 지방에 이르는 옛 로마로 이르는 길 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새로운 시토 수도원의 창설도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 기원은 1075년경 로베르토 성인한테서 출발한다.
성인은 1075년에 일단의 은수자들과 함께 랑그르 교구의 몰레슴(Molesme)에 도착하여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형태에 대해 논란이 일자 로베르토는 스테파노 하딩 등 스무 명 남짓한 수사들과 함께 몰레슴을 떠나도 좋다는 허락을 얻어 다른 곳으로 옮겨가 시토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열망하던 완전한 수도 분위기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로베르토는 마침 몰레슴 사람들의 요청이 있자 다시 돌아가게 된다. 이로 인해 시토회 첫 원장들 명단에서 로베르토는 빠져있다.
로베르토가 돌아가고 난 뒤 알베리코가 원장이 되면서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정착을 한다. 이렇게 정착하는 데는 클뤼니의 우고 원장의 도움이 컸다. 창설일은 1098년 3월 21일로 베네딕토 성인의 축일과 성지주일이 겹치는 날짜였다고 하는데, 1100년 10월 19일에 파스칼 2세 교황으로부터 법적 인정을 받았다.
이 수도회 수사들은 흰 옷을 입기 때문에 ‘하얀 수도자’란 별명으로 불렸다. 알베리코 이후 앵글로 색슨족의 귀족 출신인 스테파노 하딩이 원장이 되면서 더욱 큰 발전을 이루는데, 1113년 라페르테에, 1113년 폰티니에, 1119년 폰테나 등에 예하 수도원을 세웠다. 그러나 시토회가 진정한 명성을 이루고 교회에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성 베르나르도 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