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성 마태오 - 신기철 작
성 마태오(Matthaeus)는 원래 카파르나움에서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으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마태 9,9-13). 그는 갈릴래아 태생인 듯 하며, 마르코 복음에 의하면 알패오의 아들로 원래 이름은 레위였다(2,13-17).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신 것처럼, 레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마태오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열두 사도 중의 한 명인 성 마태오는 일찍부터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왔다. 그는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후, 80-85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첫 번째 복음서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특별히 유다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동료 유다인들을 위해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 사도는 유대 지방을 순회하다가 에티오피아와 페르시아까지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화형 또는 돌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로마 순교록은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유해는 에티오피아에 묻혔다가 10세기경에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도시인 살레르노(Salerno)로 옮겨져 공경을 받고 있다. 4복음서를 동물로 상징할 때 마태오 복음서는 글 쓰는 사람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한 데서 기인한다. 그는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 회계사와 세무 직원들의 수호성인이다. 동방 교회에서는 11월 16일에 그의 축일을 지낸다.
세리 마태오의 소명사화와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이야기는 마르코와 루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르 2,13-17; 루가 5,27-32) 마르코와 루가는 여기서 마태오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마르코는 그를 일컬어 ‘알패오의 아들’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마태오’로 적고 있다.(마르 3,18) 따라서 마태오복음의 원저자는 마르코복음의 두 부분을 참조하여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부류에 넣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라.”는 우렁찬 낯선 이의 목소리에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半信半疑)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을 지목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보인 예수추종의 두 번째 행동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트집을 잡은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과 트집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죄인’이라는 굴레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신다. 더욱이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죄인을 위한 파견사명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不淨)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