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레지오 마리애 도입
1) 1937년에 중국에 전파된 레지오 마리애는 극히 부진하여 북경에 1~2개 쁘레시디움이 명맥을 유지할 정도였으나 2차 대전 후 중국 교황 대사가 적극 활약하여 급속히 중국 전역에 확산되었다.
2) 1951년 중국 공산 정권에 의해 천주교가 박해를 받아 단원 천여 명이 순교하였고 중국 공산 정부는 성 골롬바노 외방 선교회 신부를 추방하였다.
3) 추방된 신부 중 몇 분이 한국에 입국하였고 그 당시 광주 교구 교구장 서리 현 하롤드 헨리 신부가 1953년 5월 31일 에 목포 산정동 성당에 '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을, 경동 성당에 '죄인의 의탁' 쁘레시디움을 최초로 설립하여 첫 주회합을 하였다.
4) 1955년 8월 19일, 당시 광주 대교구장이신 현 하롤드 헨리 주교가 이경재(알렉산델)신부에게 레지오 마리애를 권고, 서울 명수대 본당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현재 흑석동 본당 평화의 모후 Pr.)을 필두로 1957년 1월 29일 혜화동 성당의 상지의 좌 꾸리아를 거쳐 1960년 3월 30일 명동 무염시태 꼬미씨움(꾸리아 5개, 쁘레시디움 99개)이 설립이 되었고 1974년 9월 25일 무염시태 레지아로 승격 후, 1978년 12월 23일 무염시태 세나뚜스로 승격 되었다.(한국 레지오 마리애 오십년사 발췌)
5) 최초의 한국 세나뚜스는 레지오 마리애가 한국에 도입된 지 5년 만에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가 꼬미시움을 거쳐 1958년 국가 최상급 평의회인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로 승격됐다.
6) 서울은 1957년에는 혜화동 본당에 “상지의 좌” 꾸리아가 최초로 설립되었으며, “상지의 좌” 꾸리아는 1960년 3월 30일 "한국 무염시태 꼬미씨움"으로 승격되었고, 1974년 9월 25일에는 레지아로 다시 승격되었다.
한국 레지오 도입 25주년을 기념하여 꼰칠리움 경축 사절로 내한한 맥그래드 신부가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질적, 양적 우수성을 높이 평가하고 한국 레지오의 발전을 위하여 서울 레지아를 국가 최상급 평의회인 세나뚜스로 승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꼰칠리움에 제시하여 1978년 12월 23일 서울 대교구에 정식으로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가 승격 설립되었다.
1980년 2월 18일에는 주교단의 공동 집전으로 세나뚜스 승격 미사를 성대히 거행하게 되었고, 단원들은 레지오 마리애의 알찬 활동과 조직 확장에 매진할 것을 다짐하였다.
7)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산하 교구의 최초 설립된 쁘레시디움
- 청주교구 : 1954년 2월 15일, 북문로 하자 없으신 모후 쁘 레시디움
- 춘천교구 : 1954년 11월 1일, 홍천 무염시태 쁘레시디움
- 원주교구 : 1955년 3월 20일, 원동 천주 성총의 모친 쁘레 시디움
- 대전교구 : 1957년 3월 3일, 논산 부창동 천지의 모후 쁘레 시디움
- 인천교구 : 1957년 4월 8일, 답동 천지의 모후 쁘레시디움
- 수원교구 : 1958년 8월 21일, 양지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
- 의정부 교구 : 1956년 2월 1일, 의정부 근심하는 이의 위로 쁘레시디움